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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전 소감문

이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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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운대 법학부 1학년 이대한
나는 우당 이회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 학기 광운대학교 오창익 교수님의 현대사회와 인권에서 그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과제를 겸해서 중명전에서 열리는 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전을 다녀왔다. 중명전 2층으로 올라가 이회영, 젊은 이회영, 또는 인간 이회영의 역사를 향해 들어 갔다. 처음 보인 것은 전시전에 대한 소개였다. 그 판에 문구 중 와닿던 것이 “이회영과 6형제가 겪고 이겨낸 뼈에 사무치는 고통,감시와 옥살이, 고문으로 점철된 삶. 그에 반해 우리 기억의 초래함을 함께 조형화 한 것” 이라는 글이였다. 이때 난 우당 이회영의 업적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너무 적게 알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공교육 과정 속 어느 교과서 한 구석에 이회영에 대해서 나와 있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교육이 이회영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또 전시전을 보며 든 궁금증은 왜 전시전 제목이 ’난잎으로 칼을 얻다‘ 이라는 의문이다. 마침 우당 이회영의 그림이 있는 곳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은 서간도로 올라가 가장 가난하게 되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또는 젊은 이회영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 칼을 살 돈이 없어서 묵으로 난을 그려 그 그림을 팔아 그것으로 칼을 얻었다고 한다. 정말로 ’난잎으로 칼을 얻은 것’이다. 그는 난잎에서 칼을 얻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무장투쟁가였다. 난초 한 이파리에 조선도, 왕도, 선비도, 민중도, 혁명도 다 들어 있었다. 그의 말과 칼과 시는 하나였다. 이회영은 정말로 인간적인 인간 이회영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전시물을 다 보고 나오는 길에 나는 이회영이란 인물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고 싶었으며 그를 따라 중절모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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